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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피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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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리 피렌은 벨기에의 역사학자로, 중세 도시의 기원과 이슬람의 발흥이 서유럽에 미친 영향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로 유명하다. 그는 1862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리에주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겐트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벨기에의 역사와 중세사를 연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에 의해 포로로 수용된 경험을 바탕으로, '마호메트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는 피렌 테제를 제시하며, 이슬람 세력의 확장이 서유럽의 고대 경제와 문화를 쇠퇴시켰다고 주장했다. 주요 저서로는 《벨기에의 역사》, 《무함마드와 샤를마뉴》, 《중세 도시》 등이 있으며, 그의 연구는 경제적 요인이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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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피렌
기본 정보
앙리 피렌 초상화, 1910년경
앙리 피렌 초상화, 1910년경
본명앙리 피렌
출생1862년 12월 23일
출생지벨기에 베르비에
사망1935년 10월 25일
사망지벨기에 위클
국적벨기에
배우자제니 반데르하에겐
자녀앙리 피렌 (1888–1935)
자크 피렌 (1891–1972)
피에르 피렌 (1895–1914)
로베르 피렌 (1900–1931)
자클린 피렌 (손녀, 1918–1990)
직업
직업역사학자, 정치 운동가
소속헨트 대학교
모교리에주 대학교
학문
분야역사학
주요 저서중세 도시: 기원과 무역의 부활 (1927)
무함마드와 샤를마뉴 (1937)
수상프랑키 상 (1933)
기타

2. 생애

벨기에의 대표적인 역사가인 앙리 피렌은 겐트 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하며 중세사와 벨기에 역사 연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는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되어 정년까지 겐트 대학교에서 활동했으며, 이 기간 동안 벨기에 역사 연구의 기초를 다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점령에 대한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인해 수감 생활을 겪기도 했으나,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학문 활동을 이어갔다. 전쟁 경험은 이후 그의 역사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피렌의 주요 저작으로는 중세의 시작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담은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사후 출간, 1937년), 중세 도시 연구의 고전인 『중세도시』(1927년), 그리고 방대한 저작인 『벨기에사』(7권, 1899년~1932년) 등이 있다. 수감 중 집필을 시작한 『유럽의 역사』 역시 그의 중요한 학문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피렌은 벨기에뿐만 아니라 유럽 학계 전반에 걸쳐 인정받는 역사가이자, 벨기에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한 애국자로 기억된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62년 12월 22일 벨기에 남동부 리에주주의 산업 도시인 베르비에에서 태어났다. 리에주 대학교에 진학하여 고드프로아 쿠르트 밑에서 공부했으며, 1883년 중세 디낭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884년 장학금을 받아 독일로 건너가 라이프치히베를린에서 공부했고, 1885년에는 프랑스 파리의 국립 고문서 학교와 파리 고등 연구원에서 수학했다. 이 시기 카를 람프레히트의 독일 중세 경제사 연구에서 영향을 받았다.

1886년 24세의 나이로 겐트 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중세사와 벨기에 역사를 가르쳤으며, 1930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이 대학에 재직했다.[5] 1895년에는 람프레히트의 자료 수집 및 소개 방식을 따라 Bibliographie de l'histoire de Belgique|벨기에사 문헌fra을 출판했는데, 이는 이후 그의 대작인 『벨기에사』 저술로 이어지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2. 2. 학문적 경력과 겐트 대학교

리에주 대학교에 진학하여 1883년 중세 디낭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84년에는 장학금을 받아 독일로 건너가 라이프치히베를린에서 공부했으며, 특히 카를 고트하르트 람프레히트의 독일 중세 경제사 연구에서 영향을 받았다. 1885년에는 파리에서 국립 고문서 학교와 파리 고등 연구원에서 수학했다.

1886년, 24세의 젊은 나이에 겐트 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중세사와 벨기에 역사를 가르쳤다. 그는 1930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혹은 1931년까지) 이 대학에서 자리를 지켰다. 1895년에는 람프레히트의 자료 수집 방식을 따라 『벨기에사 문헌』(Bibliographie de l'histoire de Belgique프랑스어)을 출판했는데, 이는 훗날 그의 대작 『벨기에사』 저술과 벨기에 국가 성립의 독자성 탐구를 위한 중요한 기초 작업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하자, 피렌은 비폭력 저항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로 인해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군에 의해 억류되어 포로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억류 기간에도 그는 수용소에서 역사 세미나를 열고 동료 벨기에 포로들에게 벨기에 역사를 가르쳤으며, 순전히 기억에 의존하여 훗날 『유럽의 역사』로 출간될 원고 집필을 시작했다. 전쟁 이후 피렌은 벨기에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고, 활발한 학술 활동과 더불어 벨기에의 애국자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 3. 제1차 세계 대전과 수감 생활

제1차 세계 대전은 앙리 피렌의 개인적 삶과 학문 모두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4년 8월 3일, 독일 제국은 벨기에를 침공했고, 그의 아들 피에르 피렌은 같은 해 10월 이저 전투에서 전사했다. 피렌은 독일 역사가 카를 고트하르트 람프레히트와 학문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였으나, 람프레히트가 벨기에인들을 독일에 협력시키는 사업의 책임자가 되자 그와 관계를 끊었다.

독일 점령 하에서 피렌은 비폭력 저항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독일 점령군은 겐트 대학교 교수들에게 강의를 계속하라고 명령했지만, 피렌은 이를 거부하고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그는 1916년 3월 18일 독일 점령군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심문 과정에서 독일 장교가 피렌이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로만 답변하는 이유를 묻자, 피렌은 "나는 1914년 8월 3일 이후 독일어를 잊었다"고 답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는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한 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체포 후 피렌은 독일로 압송되어 크레펠트, 홀츠민덴을 거쳐 예나의 포로수용소에서 1916년 8월 24일부터 1918년 종전 때까지 수감 생활을 했다. 수감 중에도 그는 학문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책을 구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동부 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러시아 병사들에게 러시아어를 배웠고, 이후 러시아 포로들이 제공한 러시아 역사서를 읽으며 연구에 독특한 관점을 더했다. 또한, 벨기에 출신 포로들에게 벨기에 역사를 가르쳤으며, 오직 기억에 의존하여 로마 제국 멸망부터 시작하는 ''유럽의 역사'' 집필을 시작했다. 이 책은 전쟁, 왕조, 사건 중심의 연대기 서술보다는 사회, 정치, 상업적 흐름에 초점을 맞춘 거시적인 접근 방식으로 주목받았으며, 집필 환경을 고려할 때 그 객관성 또한 높이 평가받는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은 피렌의 역사관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 이전 독일 유학 시절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결정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전쟁을 겪으며 '게르만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역사에서 우연한 사건이나 개인의 역할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4. 전후 활동과 벨기에에 대한 애국심

피렌(가운데)은 1922년 워싱턴 D.C.백악관 방문 중 찍은 사진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은 개인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피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14년 8월 3일 독일군벨기에를 침공했고, 이 과정에서 그의 아들 피에르 피렌이 전사했다. 피렌은 독일 역사가 카를 람프레히트와 학문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돈독한 관계였으나, 람프레히트가 벨기에인들을 독일에 협력하게 하는 사업의 책임자가 되자 그와 절교했다. 독일 점령 당국은 저명한 역사가인 피렌이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하도록 허용했지만, 피렌은 비폭력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그는 체포되어 독일로 압송되었고, 1916년부터 종전을 맞은 1918년까지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억류 기간 동안 피렌은 학문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동부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러시아 병사들로부터 러시아어를 배우는 한편, 함께 수감된 벨기에 포로들에게 벨기에의 역사를 가르쳤다. 또한, 순전히 기억에 의존하여 훗날 《유럽의 역사》로 출간될 원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의 강한 애국심과 반독일 감정은 유명한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피렌이 체포되어 심문받을 때 독일군 장교가 왜 독일어를 잘하면서 프랑스어로 답변하는 것을 고집하느냐고 묻자, “나는 1914년 8월 3일 이후 독일어를 잊었다”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전쟁 이후, 피렌은 독일 문화에 대한 벨기에 사회의 광범위한 환멸을 반영하면서도, 학문적으로 독일 연구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인종 이론과 푈키쉬 민족주의를 독일 제국주의의 전쟁 과잉을 불러온 근본 원인으로 지목하며 강하게 비판했다.[6] 전쟁 경험은 그의 역사관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 가졌던 인류의 불가피한 진보에 대한 믿음은 약화되었고, 역사에서 우연한 사건이나 개인의 역할이 갖는 중요성을 점차 인정하게 되었다. 이는 그가 젊은 시절 독일 유학 중 접했던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변화였다.

전쟁이 끝난 후, 피렌은 16세기 중반에서 《유럽의 역사》 집필을 중단하고 벨기에로 돌아와 학자로서의 삶을 재개했다. 그는 벨기에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역사 논쟁의 중심인물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또한 벨기에의 애국자로서 국가의 정체성 확립에도 기여했다. 그는 1935년 브뤼셀 위클에서 사망했다.

그가 수용소에서 집필하기 시작했던 《유럽의 역사》 원고는 전쟁에서 살아남아 역시 저명한 역사가가 된 아들 자크 피렌이 발견했다. 자크 피렌은 아버지가 기억에 의존해 썼기 때문에 불확실했던 연도 등을 보완하고 편집하여 1956년에 출판했다. 이 책은 서로마 제국의 해체부터 르네상스까지를 다룬 방대한 저작으로, 그의 대표적인 학문적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3. 피렌 테제

서유럽의 탄생, 즉 고대 세계에서 중세 초기로의 전환에 대해 앙리 피렌은 '마호메트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는 유명한 명제로 요약되는 피렌 테제를 제시했다.[1] 그는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를 정복하여 상업 활동을 막으면서 서유럽의 고대적 경제 생활과 문화가 종말을 맞이했다고 주장했다.[1] 이 주장은 발표되자마자 학계의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1928년 오슬로에서 열린 역사 학회에서도 주요 논쟁거리가 되었다.[1]

3. 1. 중세 도시의 기원

안트베르펜 (약 1540년) 도시의 모습


앙리 피렌은 1895년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으로 유럽 도시 형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제시했다.[7]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에서의 수감 생활 동안 이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켜 '피렌 테제'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922년부터 1923년까지 관련 논문들을 발표했으며, 남은 생애 동안 이 테제를 뒷받침할 증거를 모으고 다듬었다. 그의 이론은 ''중세 도시: 그 기원과 무역의 부활''(1927)과 사후 출판된 ''무함마드와 샤를마뉴''(1937)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8]

피렌 테제는 19세기 서술 역사와는 다른 초기 경제사 연구로, 9세기에 유럽의 장거리 무역이 크게 위축되었다고 본다. 당시 유럽에는 순수한 농업 정착지를 제외하면, 봉건제 하의 봉건 지배 계급을 위한 요새, 주교좌, 수도원, 그리고 왕족이 순회하며 머무는 궁전 등 교회, 군사, 행정 중심지 등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10세기 말과 11세기에 무역이 다시 활발해지면서, 상인과 장인들이 기존의 중심지 주변으로 모여들어 무역과 제조업에 특화된 교외 지역을 형성했다. 이들은 기존 봉건 질서 밖에 있던 "새로운 사람들"로서, 기성 사회의 주변부에서 활동했다. 반면, 기존의 봉건적 중심지는 변화 없이 정체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롭게 성장한 상인 계급은 점차 강력해져 봉건적 의무에서 벗어나거나 기존 질서의 특권을 사들였고, 이 과정에서 부르주아 귀족을 형성하며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피렌은 이러한 새로운 세력이 여러 면에서 기존 봉건 질서와 대조된다고 보았다. 피렌은 그의 테제에서 13세기와 14세기의 잘 알려진 갈등들을 고려할 때, 봉건 귀족과 도시 귀족의 이해관계가 본질적으로 양립 불가능했다는 점을 당연시했지만, 이러한 측면은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상세하게 비판받았다.[9]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5세기의 서로마 제국 멸망을 중세 시대의 시작점으로 여겨왔다. 이는 18세기 에드워드 기번이 주장한 이래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였다. 그러나 피렌은 고전 문명의 종말 시점을 8세기로 늦춰 잡았다. 그는 민족 이동 시대의 게르만족이 서로마 제국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통념과, 476년 로마 황제 직위 소멸을 제국 멸망과 동일시하는 관점에 이의를 제기했다. 피렌은 로마 시대의 지중해 경제가 야만인의 침략 이후에도 본질적인 연속성을 유지했고, 로마식 생활 방식 역시 제국 멸망 직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로마 영토로 들어온 게르만족(고트족 등)은 로마 문명을 파괴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혜택을 누리고 로마적 생활 방식을 보존하려 했다. 이러한 피렌의 주장은 이후 "후기 고대"라는 개념의 등장과 함께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이 단절보다는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시각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20세기 후반 이후 유럽 고고학 연구는 정치적 변화의 이면에서 물질 문화와 정착 패턴의 연속성이 11세기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주며 피렌의 주장을 일부 뒷받침한다.[10]

피렌은 1922년 미국에서의 강연 내용을 바탕으로 저술한 ''중세 도시: 기원과 무역의 부활''(1927)에서, 10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유럽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지중해의 주도권을 되찾고 동방으로 가는 해상 교역로를 열면서 상업이 부활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상인/중간 계급이 도시라는 그들만의 독특한 거주 형태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자본주의민주주의 역시 이러한 유럽의 도시들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상인 기업 학파' 이론은 마르크스주의에는 반대했지만, 상인 계급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생각과 일부 공유하는 측면도 있었다. 11세기 도시에서의 상업 부흥이 중세 도시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다는 피렌의 이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표준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피렌은 독일의 실증주의 역사학의 영향을 받아 '이념'보다는 '사실'을 중시했으며, 역사를 움직이는 주된 동력을 상업과 공업 같은 경제적인 힘으로 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처럼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단선적인 발전 도식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자본주의 발달의 초기 단계'라는 논문에서 12세기에 이미 중세 자본주의의 초기 형태가 나타났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솜바르트에게 '자본주의 발전에 관한 놀라운 무지'라고 혹평받기도 했다. 또한 피렌은 벨기에 국가의 기원에 대해, 그것을 '민족의 본질'에서 설명하는 대신, 뫼즈강과 스헬데강 유역에서 로망스어 지대와 게르만어 지대가 끊임없이 교류하는 중간 지점에서 태어난 독특한 장점을 가진 국가라고 논술했다.

서유럽 문명의 발생, 즉 고대 세계에서 중세 초기로의 전환 과정에 관해 피렌은 '마호메트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출했다. 즉, 지중해가 이슬람의 정복에 의해 상업 지역으로서 폐쇄되면서 서유럽에서는 고대적 경제 생활과 그 문화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졌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주장은 발표 직후부터 찬반 양론을 일으켰고, 1928년 오슬로 역사 학회에서 다시 논의되었을 때 매우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피렌의 글은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운 문체로 복잡한 역사 현상을 사실에 기반하여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의 뛰어난 역사가적 자질을 드러낸다.

3. 2. 이슬람의 발흥과 서로마 제국의 붕괴

7세기 디나르, 압드 알-말리크 이븐 마르완의 것


피렌에 따르면 로마 역사에서 진정한 단절은 4~5세기의 게르만족 침입이 아니라, 8세기에 있었던 초기 무슬림 정복으로 인한 아랍의 팽창으로 발생했다. 이슬람 세력이 오늘날의 남동 터키, 시리아, 팔레스타인, 북아프리카, 스페인, 포르투갈 지역을 정복하면서 서유럽과의 경제적 관계가 끊어졌고, 이로 인해 서유럽은 무역에서 고립되어 점차 정체된 후진 지역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서유럽의 부는 원자재 형태로 동방으로 유출되었지만, 그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꾸준한 쇠퇴와 빈곤을 초래했고, 결국 샤를마뉴 시대에 이르러 서유럽은 거의 전적으로 자급자족적인 농경 사회가 되었으며, 장거리 무역은 사실상 사라졌다고 보았다.[11]

피렌은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이슬람이 없었다면 프랑크 제국은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샤를마뉴는 무함마드 없이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로 요약했다.[12] 즉, 그는 북아프리카에 대한 이슬람의 정복으로 지중해가 교류의 바다가 아닌 장벽으로 변모했고, 이로 인해 서유럽이 동방 세계로부터 고립되면서 샤를마뉴를 포함한 카롤링거 왕조가 독자적인 서방 형태의 문명과 정부를 창출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피렌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통계 자료, 특히 화폐와 관련된 증거를 제시했다. 그의 논리는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유입되어야 할 물품들이 서유럽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예를 들어, 알프스 산맥 북쪽 지역에서 화 주조가 7세기 이후 중단된 것은 당시 세계의 부유한 지역이었던 동방과의 교류가 끊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했다. 또한, 이집트에서만 생산되던 파피루스가 7세기 이후 북유럽에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필기 재료가 다시 양피지로 돌아간 것 역시 서유럽의 경제적 고립을 나타내는 현상으로 보았다.

피렌의 이러한 주장은 발표 당시 많은 역사가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후 그의 이론은 중세 초기 역사를 둘러싼 중요한 학문적 논쟁을 촉발시켰다. 또한, 역사의 시대 구분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13][14] 피렌 테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역사학계의 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최근에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들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지, 아니면 반박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15][16]

3. 3. 피렌 테제에 대한 논쟁과 비판

앙리 피렌은 서유럽의 발생, 즉 고대 세계에서 중세 초기 세계로의 이행에 관해 '마호메트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라는 유명한 문구로 표현되는 피렌 테제를 제시했다.[1] 그는 지중해가 이슬람 세력의 정복으로 인해 상업 지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서유럽에서는 고대적인 경제 생활과 그 문화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졌다고 주장했다.[1] 이 주장은 발표 즉시 학계에서 찬성과 반대 의견이 격렬하게 맞서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1] 1928년 오슬로에서 열린 역사 학회에서 피렌이 이 테제를 다시 발표했을 때도 매우 활발한 논쟁이 벌어졌다.[1]

한편, 피렌은 자본주의 발달 초기 단계에 대한 연구에서 12세기에 이미 중세 자본주의의 초기 형태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며 이를 입증하려 했다.[1]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 솜바르트는 '자본주의 발전에 관한 놀라운 무지'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1] 피렌은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연속이라는 도식적인 관점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경제적인 힘, 특히 상업과 공업을 역사 발전의 주요 동인으로 보았다.[1]

4. 벨기에 역사 연구

앙리 피렌의 주요 연구 분야 중 하나는 벨기에의 역사였다. 그의 대표작인 7권짜리 ''벨기에 역사''(1899–1932)는 당대 벨기에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가 에른스트 코스만은 이 책이 왕족부터 학생, 군인, 부르주아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사회 각계각층에서 널리 읽혔다고 평가했다.[17]

현재 벨기에


피렌은 이 책을 통해 1830년에 건국된 벨기에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지며, 플랑드르와 왈롱 지역을 통합하는 독자적인 '벨기에 문명'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벨기에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역할을 했지만, 그의 주장은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벨기에가 로망스어 사용 유럽과 게르만어 사용 유럽 사이의 교차점에서 발전했으며, 인종에 기반한 민족 개념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역사 연구 방법론에 있어서 피렌은 독일의 실증주의 역사학의 영향을 받아 경제적 요인, 특히 상업과 공업의 발전을 역사의 주요 동력으로 간주했다. 그는 중세에 이미 자본주의의 초기 단계가 있었다고 보았으며,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도식적인 역사관과는 차이를 보였다. 또한 서유럽 전체의 역사와 관련하여, 그는 "마호메트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는 유명한 명제, 즉 '피렌 테제'를 통해 이슬람 세력의 지중해 장악이 서유럽 고대 경제의 종말과 중세 사회의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은 발표 이후 학계에서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피렌의 연구는 명쾌한 문체와 사실에 기반한 서술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는 당대 벨기에의 주요 지식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벨기에 문명의 연속성에 대한 그의 주장이나 저지대 국가에 대한 스페인 통치의 영향을 평가한 부분 등 일부 내용은 후대 연구를 통해 비판을 받거나 수정되었다.[18][19] 피렌은 개인 소장 도서의 상당 부분을 로마의 벨기에 학술원에 기증했으며, ''벨기에 역사'' 제7권은 1933년 프랑키 상 인문 과학 분야에서 수상했다.

4. 1. 벨기에 국가 정체성 확립 노력

앙리 피렌은 벨기에1830년에 독립적인 국민 국가로 등장했지만, 그 역사는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며 벨기에의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당시 벨기에는 현재의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북부 프랑스 일부를 포함하는 저지대 국가의 역사와 얽혀 있었으며, 프랑스어 사용 지역(왈롱)과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플랑드르) 사이의 깊은 언어적, 문화적 장벽이 존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벨기에의 통일은 우연처럼 보일 수 있었기에, 피렌은 그의 대표작 ''벨기에 역사''(1899–1932)를 통해 벨기에 역사의 연속성을 증명하고자 했다.[17]

총 7권으로 구성된 ''벨기에 역사''에서 피렌은 전통적인 힘과 경제적인 힘이 어떻게 플랑드르와 왈롱 지역을 역사적으로 결합시켜 왔는지를 강조했다. 그는 벨기에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며, 사회적, 정치적, 민족적 의미에서 1830년 독립 이전 수세기 동안 통일된 '벨기에 문명'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역사 서술은 당시 벨기에 사회의 분열된 구조를 넘어 가톨릭,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동등하게 존중하며 인용할 정도로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주었다.

피렌은 인종적으로 정의된 '민족정신'(Volksgeist|폴크스가이스트de) 개념을 피하면서, 벨기에가 로망스어 사용 유럽과 게르만어 사용 유럽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며 독자적인 문명을 자연스럽게 발전시켰다고 설명했다. 이는 당시 민족주의 역사학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다른 혁신적인 접근 방식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뫼즈강과 스헬데강 유역에서 로망스 문화권과 게르만 문화권이 끊임없이 교류하며 벨기에만의 독특한 정체성이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피렌의 이러한 노력은 그를 당대 벨기에의 주요 지식인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주장은 벨기에의 과거를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정치적 통일의 기초로서 '벨기에 문명'의 연속성을 강조한 그의 핵심 개념은 시간이 흐르면서 비판에 직면했고, 오늘날에는 많은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일부 벨기에 학자들은 벨기에의 건국이 역사적 필연성보다는 우연의 일치에 가깝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8] 또한, 저지대 국가에 대한 스페인 통치가 지속적인 문화적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았다는 피렌의 주장 역시 1970년대 이후 문화사, 군사사, 경제사, 정치사 분야의 새로운 연구들을 통해 반박되었다.[19]

앙리 피렌은 개인 소장 도서의 대부분을 로마에 있는 벨기에 학술원에 기증했으며, 그의 역작 ''벨기에 역사'' 제7권은 1933년 인문 과학 분야에서 프랑키 상을 수상했다.

4. 2. 벨기에사의 독자성 강조

피렌은 중세 벨기에의 본질과 역사적 독자성에 대해 중요한 주장을 펼쳤다. 벨기에는 피렌이 태어나기 한 세대 전인 1830년에야 독립 국가가 되었으며, 이전까지 그 역사는 현재의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북부 프랑스 일부를 포함하는 저지대 국가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더욱이 프랑스어 사용 지역(왈롱)과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플랑드르)으로 나뉘는 언어적, 문화적 차이로 인해 국가의 통일성이 약해 보일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피렌은 1899년부터 1932년까지 총 7권으로 출간된 그의 기념비적인 저작 ''벨기에 역사''를 통해 벨기에가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온 고유한 역사와 문명을 지녔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는 전통적인 정치사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힘, 특히 상업과 공업이 어떻게 플랑드르와 왈롱 지역을 역사적으로 결합시켰는지 강조했다. 피렌은 사회적, 정치적, 민족적 의미에서 1830년 독립 이전 수세기 동안 통일된 "벨기에 문명"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며, 이는 당시 벨기에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학계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피렌의 역사 서술은 몇 가지 혁신적인 특징을 지녔다. 그는 자유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벨기에 사회의 분열(소위 기둥화된 사회)을 넘어서 가톨릭,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다양한 집단이 공감하고 인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의 책은 왕족부터 학생, 군인, 부르주아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사회 각계각층에서 널리 읽혔다.[17] 또한, 그는 인종에 기반한 배타적인 '민족정신' 개념을 거부하고, 벨기에가 로망스어 사용 유럽과 게르만어 사용 유럽 사이의 교차점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한 세계적인 사회라고 주장했다. 이는 동시대 민족주의 역사학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차별화되는 점이었다. 구체적으로 그는 벨기에 국가의 기원을 뫼즈강과 스헬데강 유역에서 로망스어 문화권과 게르만어 문화권이 끊임없이 교류하며 형성된 독특한 문명에서 찾았다.

피렌은 독일의 실증주의 역사학의 영향을 받아 '이념'보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었으며, 역사를 움직이는 주요 동력으로 경제적인 힘, 즉 상업과 공업의 발전을 중요하게 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처럼 역사를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도식적인 틀로 해석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자본주의 발달의 초기 단계'라는 논문에서 12세기에 이미 중세적 형태의 자본주의가 나타났음을 주장했는데, 이는 베르너 솜바르트와 같은 학자들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피렌의 역사관은 서유럽 전체의 역사 해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고대 세계에서 중세 초기로의 전환 과정에 대해 ''마호메트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는 유명한 명제, 이른바 '피렌 테제'를 제시했다. 이는 7세기 이슬람 세력의 지중해 장악으로 인해 동서 교역로가 막히면서 서유럽의 고대적 경제 기반과 문화가 쇠퇴하고 중세 봉건 사회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가설은 발표 직후부터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1928년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 역사 학회에서도 격렬한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피렌의 역사 서술은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운 문체로 복잡한 역사적 현상을 설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주장은 벨기에의 과거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참고 자료이지만, 벨기에 문명의 연속성에 대한 그의 핵심적인 주장은 후대에 들어 많은 도전을 받았다. 일부 벨기에 학자들은 벨기에의 건국이 역사적 필연보다는 우연의 결과에 가깝다고 주장하며,[18] 저지대 국가에 대한 스페인 통치의 영향이 미미했다는 피렌의 견해 역시 1970년대 이후의 새로운 연구들을 통해 반박되었다.[19]

앙리 피렌은 자신의 방대한 개인 도서를 로마의 벨기에 학술원에 기증했다. 그의 ''벨기에 역사'' 제7권은 1933년 프랑키 상 인문 과학 분야에서 수상했다.

5. 주요 저서


  • 《벨기에의 역사》 (Histoire de Belgique프랑스어, 전 7권, 1899–1932)[20]
  • "부르군트 국가의 형성 및 구성(15세기와 16세기)" (The Formation and Constitution of the Burgundian State (Fifteenth and Sixteenth Centuries)영어), 미국 역사 평론, Vol. 14, No. 3, pp. 477–502, 1909.
  • 《벨기에 민주주의, 초기 역사》 (Belgian Democracy, Its Early History영어, 1910, 영어 번역 1915)[21] - 저지대 국가의 도시 역사에 관한 저술.
  • "자본주의 사회사의 단계" (The Stages in the Social History of Capitalism영어), 미국 역사 평론, Vol. 19, No. 3, p. 494, 1914.[22]
  • 《중세 도시: 그 기원과 무역의 부활》 (Medieval Cities: Their Origins and the Revival of Trade영어, 1927)[23]
  • 《유럽의 역사: 서양 로마 제국 멸망에서 서구 국가의 시작까지》 (A History of Europe: From the Invasions to the XVI Century영어, 1936 출판)[24] -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집필한 미완성 유고. 사후 아들 자크 피렌이 출판.
  • 《중세 유럽의 경제 및 사회사》 (Economic and Social History of Medieval Europe영어, 1956)[25]
  • 《무함마드와 샤를마뉴》 (Mahomet et Charlemagne프랑스어, 1937)[26] - 사후 출판된 유작.
  • 《중세 도시론집》 (Les villes et les institutions urbaines프랑스어, 1939) - 사후 출판된 논문 모음집.
  • "어느 외톨이의 성찰" (Journal de Guerre프랑스어), 벨기에 왕립 역사 위원회 공보, Vol. 160, No. 3–4, pp. 143–257, 1994.[27] - 제1차 세계 대전 중 쓴 감옥 일기. 사후 출판.

참조

[1] 웹사이트 Henri Pirenne at geneanet.org https://gw.geneanet.[...]
[2] 서적 Encyclopedia of the City https://archive.org/[...] Routledge
[3] 서적 The Economic and Social Foundations of European Civilization
[4] 서적 Dark Age Economics. The origins of towns and trade, ad 600–1000 London
[5] 웹사이트 Overzicht rectoren https://www.ugent.be[...] 2019-11-06
[6] 학술지 "That Theory of Races" Henri Pirenne on the Unfinished Business of the Great War 2011
[7] 학술지 L'origine des constitutions urbaines au Moyen Age 1895
[8] 서적 Mohammed and Charlemagne https://archive.org/[...] 1922
[9] 학술지 The Origins of the Medieval Town Patriciate 1953-02
[10] 서적 The First Millennium AD in Europe and the Mediterranean: an archaeological essay
[11] 서적 Mohammed and Charlemagne
[12] 서적 Medieval Cities https://books.google[...]
[13] 서적 French Historians 1900–2000: New Historical Writing in Twentieth-Century France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14] 서적 The Mediterranean in History https://books.google[...] Getty Publications
[15] 웹사이트 The Early Middle Ages, 284–1000 — Lecture 17: The Crucial Seventh Century http://oyc.yale.edu/[...]
[16] 서적 Mohammed & Charlemagne Revisited: The History of a Controversy https://books.google[...] New England Review Press
[17] 서적 The Low Countries, 1780-1940 Clarendon Press 1978
[18] 학술지 La Belgique, Un Accident De L'histoire?
[19] 학술지 New Light on an Old Theme: Spain and the Netherlands 1550–1650
[20] 서적 Histoire de Belgique https://archive.org/[...] Bruxelles : H. Lamertin 1902-01-01
[21] 서적 Belgian Democracy: Its Early History https://archive.org/[...]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15-01-01
[22] 서적 The Stages in the Social History of Capitalism http://www.gutenberg[...] 2010-05-04
[23] 서적 Medieval Cities: Their Origins and the Revival of Trade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6-01-01
[24] 서적 History of Europe https://books.google[...] Read Books 2008-05-01
[25] 서적 Economic and Social History of Medieval Europe https://books.google[...] Harcourt, Brace 1937-01-01
[26] 서적 henri pirenne mohammed charlemagne https://archive.org/[...]
[27] 학술지 Henri Pirenne's Réflexions d'un solitaire and his re-evaluation of history 1997-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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